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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 99%을 - 존재의 조건이 찢긴 자들 (커버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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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 99%을 - 존재의 조건이 찢긴 자들
  • 평점평점점평가없음
  • 저자신창용 지음 
  • 출판사스틱 
  • 출판일2018-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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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돈과 거짓신화를 향한 흠모와 고발
‘99%을’이 절규하는 투쟁소설! 《탈출》의 두 번째 이야기! 전 권을 읽지 않아도 이야기의 이해나 흐름에 방해받는 것은 없다. 주인공 ‘M’과 이야기를 이끄는 ‘파비안’, 그들은 자본권력과 ‘1%갑’의 폭력에 순치되거나 살아남으려 무던히도 애쓴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그들을 저 밑바닥 끝까지 내던져버린다. 민심의 권태와 법의 타락, 선한 정부의 무능과 언론의 동조, 그리고 만인의 폭력과 자본의 폭력에 의해 욕망의 화신이 된 것처럼 보이는 그들은 저 폭력들에 맞서는 것인지, 아니면 현실을 수용하는 것인가?
‘99%을’은 저 폭력을 어찌해야 하며, 궁극의 ‘공존(共存)’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이 소설은 묻고 파헤친다. 지난한 투쟁이 후세에 그 영광을 넘기는 바가 우주적 질서라면, 인간은 어떤 구제가 가능할까? 주인공 ‘파비안’은 저 근본 물음에 침묵하거나 어지러이 떠돈다.
‘이 소설은 왜 예민한 현실의 정치와, 권력과, 경제에 천착하는가?’ 세상을 지배하는 영역인 정치·권력·경제 세계에 눈을 감거나 지나친 방론에 머무는 인문이 무슨 의미인가를 묻는다. 세상을 좀 더 깊게 들여다보고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진중하게 읽어볼 때다. 어쩔 수 없다고 떠들어대는 자본의 변명과 자기정당화, 과연 정당한가?

권력·정치·경제 등 상부구조의 진실을 ‘99%을’에게 보내는 소설!
패배가 생존이유인 ‘99%을’이 절규하는 투쟁소설

《탈출》은 갑자기 끊어져 버렸다. 더 나아간들 희망을 말할 수 없었다. 희망의 설정은 타협이거나 속이는 것이었다. 이 《탈출, 99%을》에서의 ‘폭력’도 만유(萬有)에 내린 그것에 그리 다를 것이 없다. 인물들은 마찬가지로 그 폭력에 순치되거나 살아남으려 한다. ‘99%을’은 저 폭력에 맞서 어찌해야 하며, 궁극의 ‘공존(共存)’은 부존재인가? 지난한 투쟁이 후세에 그 영광을 넘기는 바가 우주적 질서라면, 인간은 어떤 구제가 가능한가? 주인공 파비안은 저 근본 물음에 침묵하거나 어지러이 떠돈다.

저자 이야기
 소설로써 상부구조에 대한 마치 최초이듯이 한 도전

권력, 정치, 경제 등에 대한 사고나 발상이 워낙 도발적이고 광범위해서, 소설로써는 상부구조에 가장 밀착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도 크고 난해한 사회적·국가적 문제나 이슈에 깊숙이 침투하고 있다. ‘로만’이라는 가상의 공간이지만, 그 실질이 바로 대한민국 현재가 가진 문제들의 틀이다. 이 책에서 자본과 자본에 길든 널리 시민의식, 근본모순의 재벌, 개혁 저지세력으로 널리 공조직 등에 대한 문제의 제기에는 바로 ‘99%을’의 삶을 어찌할 것인가에 걸려있다. [로만이 가진 폭력의 편재(遍在)로부터 ‘99%의 을들’이 자유로울 것임에 대해, 내가 살아서는 그 기대가 없었다. -소설 211쪽]라고 회고하는 바에서도 보듯이, 화자이자 주인공이라 할 ‘파비안’은 로만의 가능성에 대해 절망하는 처지인데, 그의 의식 기저에는 ‘무정부주의자’의 그것도 짙게 침윤해 있다. 그러면서도 대단한 생활력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보유한, 절대 간단치 않은 캐릭터이다.

 작품으로서의 소설의 훼손을 넘어, 소설의 현주소에 대한 뒤틀림
-소설이 왜 예민한 현실의 정치와, 권력과, 경제에 천착하는가?
세상을 지배하는 영역인 정치·권력·경제의 세계에 눈을 감거나 지나친 방론에 머무는 인문이 무슨 의미인가를 묻는다. 세상을 지배하는 에너지에서 비켜나 삶을 탐색하는 소설은 그 인간적 고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자기위안의 미시적 세계에 함몰된다. 그렇게 되게 되어 있다. 더구나 자본의 지배라는 현대의 환경 아래서는, 소설이 ‘널리 인간을 이롭게’를 훼손하는 상업적 수단을 통한 자기연명으로 간다. 그렇게 가게 되어 있다. 너무나 복잡하고 난해한 현대의 정치·권력·경제의 현상, 쉽게 손이 가는 압도적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강력한 유인자인 영상문화 등의 지배 아래 인간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한편으로는 하루하루 사는 것도 팍팍하다. 해서, 사유와 긴 호흡의 문화수단인 소설로는 저런 지배적 현실에 정면으로 대결할 수 없다고, 그 이전에 저 현실을 읽어낼 코드도 없다는 강변이 나올 만하다. 그러면! 다시 소설이 말잔치로써 자기위안과 상업적 합리성이라는 폭력의 우산에 계속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그 닫힌 환원론을 어찌할 수 없다는 허무를 걷어낼 수 없다. 미학적 접근이 쉽지 않은 정치·권력·경제의 영역과의 다툼을 가짐으로써 창작물로써 소설의 고유성이 훼손되는바 모르지 않지만, 그런 아쉬움을 가질 수 없다. 독자의 호불호가 어떠하든, 설령 훼손의 염이 떠나지 않더라도 삶의 실체를 선택일 수밖에 없다. 돈과 거짓 신화의 악마는 정치적 무관심이나 외면이 일상화된 사회를 탐한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나 외면이 팽배한 곳은, 바로 재벌과 ‘1%갑’이 ‘99%을’을 현혹하고 다스리기 딱 좋은 환경이다. (-후기 253쪽)

[미학적 접근이 쉽지 않은 정치·권력·경제의 영역과의 다툼을 가짐으로써 창작물로써 소설의 고유성이 훼손되는바 모르지 않지만, 그런 아쉬움을 가질 수 없다.]라고 한 부분에서 보듯이 정치·권력·경제과 같은 상부구조에 ‘직접’ 침투한 소설이라는 점에서의 작가적 불만을 등장인물에게 화자의 역할을 넘기고도 부족해, 역할을 받은 화자가 [다만, 소설적 형상화는 마치 운명인 듯 ‘세상의 널리 폭력’과의 다툼을 회피하거나 오히려 은폐하는 결과일 수 있다는, 나의 억지가 있다. 해서 나는 작가의 입장을 떠나, 저 형상화라는 전형을 그때그때 이런저런 이유로 이탈할 수밖에 없다. -소설 9쪽]라고 말하게까지 하고 있다. 결국, 무엇인가? [세상을 지배하는 에너지에서 비켜나 삶을 탐색하는 소설은 그 인간적 고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자기위안의 미시적 세계에 함몰된다. 그렇게 되게 되어 있다. 더구나 자본의 지배라는 현대의 환경 아래서는, 소설이 ‘널리 인간을 이롭게’를 훼손하는 상업적 수단을 통한 자기연명으로 간다. 그렇게 가게 되어 있다.]라고 하였듯이, ‘작품으로서의 소설의 훼손’이 아쉬우면서도 무력해진 오늘날 소설의 현주소에 대한 반기를 든 결단으로 보아야 할 터이다.

 문장인용을 통한 이 책의 접근 (밑줄 치고 싶은, 사회적 사유·담론에 관한 문장들의 향연)
이 소설과 후기는 대한민국의 상태성에 대해 거의 전부 다 밑줄 칠 수도 있는 사유(思惟)나 담론(談論)으로 가득하다. 법치국가임에도 법의 손이 미치지 않거나 법 외면하는 국가·사회를 지배하는 사회적 에너지의 문제, 1가구1주택에 대한 면세 문제 및 소유권제도 그 자체에 관한 관점에서 읽는 한국 부동산의 근본문제, 자본과 결합한 합리성·이성(理性)이 초래하는 ‘갑을 관계’의 영속화 문제 등을 비롯해 우리 삶을 규정하는 요소나 쟁점에 관한 사유나 담론이 숱하게 깔렸다. 다만 이 소설과 후기에서의 사유나 담론은 그 독자성이 분명하여, 읽는 사람마다 다양한 판단이나 입장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해서, 누구의 주석이나 해석보다는 독자가 그 문장 자체를 읽고 긍정이든 부정이든 각자 가지는 것이 좋다. 해서 그 사유·담론을 옮기되, 이 책 전부가 사유·담론으로 점한다고 할 정도로 너무 많아 아쉽지만, 그 일부만을 싣는다. 다만, 그 분량을 최대한 줄여도 그 양이 많음에 ‘읽는 이들에게 어떨까!’라는 부담이 남는다.

저자소개

하나의 선택이 삶 전체를 규정해버리는 삶의 불가지(不可知)와 위험, 수인의 한계를 넘은 ‘갑과 을’의 불평등 구조, 진화의 본질적 장애인 이념의 불균형, 눈물과 피를 바쳐 얻은 자유와 인권이 자본에 의해 다시 규정되는 현실, 역사발전의 완만함이나 의문 등에 대한 사유가 오래 쌓여 버티지 못하고 그 일단이 이 졸작으로 형상화되었다.

목차

1 완전한 추방
2 매튜를 향하여
3 로만국회인권위원회
4 경찰서에서
5 불붙은 보고서
6 위험한 보고서
7 법률상담카페
8 위험한 로린
9 정부지원사업체에서
10 가구수리보조원이 되어
11 매튜의 선물
12 마크에게 가는 길에
13 파비안의 길

후기 또 하나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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