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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계와 사랑 (커버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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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계와 사랑
  • 평점평점점평가없음
  • 저자프리드리히 폰 실러 (지은이), 이원양 (옮긴이) 
  • 출판사지만지드라마 
  • 출판일2019-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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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지만지드라마>는 지식을만드는지식의 희곡, 연극 전문 출판 브랜드입니다. 지식을만드는지식은 문학사와 공연사에 길이 남을 세계적인 고전과 현대 희곡 243종을 비롯해 한국근현대희곡 100종을 출간하며 연극을 사랑하는 독자들로부터 지지를 얻었습니다. 343종의 희곡이라는 자산과 출간 경험이 지만지드라마 출범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전 세계의 고전 희곡, 문학성과 공연성을 인정받은 전 세계 현대 희곡, 한국 연극계에 꼭 필요한 이론 서적들, 그 외 의미 있는 기획 도서 출판을 통해 국내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전문성 있는 연극·공연 출판 브랜드가 되겠습니다.

<간계와 사랑>은 절대군주와 귀족계급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 도전장이며, 시민비극의 최고봉을 이룬다. 시민비극은 독일 역사상 일정한 기간에 나타난 희곡의 장르로서 일종의 시대극이다. 시대극은 물론 시대적 배경이 바뀌면 시의성을 잃게 된다. 그러나 <간계와 사랑>은 오늘날까지도 독일의 무대에서 생명력을 자랑하는 ‘스테디셀러’다. 이 극작품이 시대극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뛰어넘는 문학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에는 비극의 주인공은 왕이나 귀족과 같이 고귀한 신분이어야 한다는 신분 조항이 있는데, 시민계급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이제 시민들도 당당히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실러의 극작품 중에서 동시대의 사회 및 정치적인 문제를 다룬 희곡은 <간계와 사랑>이 유일하다. 또한 <간계와 사랑>은 희곡 구성과 극적인 사건의 전개가 치밀하게 잘 짜여 있어서 가히 희곡 작법의 교범이 될 만하다. 독일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간계와 사랑>은 오늘날 연극으로서뿐만 아니라 문학작품으로서도 많은 사람들의 애호를 받고 있어서 우리가 꼭 읽어야 되는 고전 작품이다.

저자소개

1759년 11월 10일에 독일 남서부 뷔르템베르크(W?rttemberg) 공국의 작은 마을인 마르바흐(Marbach)에서 태어나 군의관인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슈바벤 지방의 로르히(1764), 루트비히스부르크(1766)로 옮겨 다니며 성장한다. 1773년 뷔르템베르크의 카를 오이겐(Karl Eugen) 공작의 명령에 의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엘리트 사관 학교인 카를스슐레(Karlsschule)에 입학해서 법학을 전공하다가 전공을 의학으로 바꾸어서 1780년에 졸업하고, 슈투트가르트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하면서 1781년에 익명으로 첫 번째 드라마 ≪군도(群盜, Die R?uber)≫를 자비로 출판하고, 그다음 해에 이 작품이 초연되면서 ‘질풍노도’ 문학의 중요한 작가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군도≫의 혁명적인 내용으로 인해 신변의 위협을 느낀 실러는 1782년 9월에 공국을 탈출해서 만하임,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튀링겐 지방의 바우어바흐(Bauerbach)로 피신해 리터(Ritter)라는 이름으로 의사 활동을 시작한다.
1787년 7월 실러는 바이마르로 가서 괴테의 친구들인 헤르더와 빌란트를 만나고 이들의 영향으로 역사학과 그리스 고전 연구에 빠진다. 1788년 9월에는 드디어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괴테와 만나고 괴테의 주선으로 예나대학에서 역사학을 강의하게 된다. 사회적 신분을 얻게 된 실러는 샤를로테 폰 렝게펠트에게 구혼해 1790년 2월에 결혼한다. 실러는 열정적으로 역사 연구에 매진해 <30년 전쟁사(Geschichte des dreißigj?hrigen Krieges)>(1791∼1793)를 비롯한 많은 역사 논문을 발표한다. 그러나 너무 열정적으로 일하다 보니 1791년 1월에는 심한 발열로 중병이 들어 그해 여름까지 생명이 위독할 정도의 상태에 빠진다.
병으로 교수직을 내놓은 실러는 칸트 연구에 몰두한다. 1794년 초에는 예나로 거주지를 옮긴다. 1795년 ≪호렌≫을 발행하기 시작한다. ≪호렌≫에는 헤르더, 피히테,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 알렉산더 폰 훔볼트, 요한 하인리히 포스와 프리드리히 횔덜린과 같은 쟁쟁한 작가들과 철학자들이 함께 참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호응을 받지 못하자 괴테와 함께 자신들을 비방하는 문인들을 공격하는 2행시 모음집인 <크세니엔>을 실러가 1796년부터 발행하는 ≪문예 연감(Musen-Almanach)≫에 발표하게 된다.
1797년은 실러의 “발라드의 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뛰어난 많은 발라드(담시)가 나왔다. 그 가운데 <장갑(Der Handschuh)>, <잠수부(Der Taucher)>, <종(鐘)의 노래(Lied von der Glocke)>, <폴리크라테스의 반지(Der Ring des Polykrates)>, <이비쿠스의 두루미들(Kraniche des Ibykus)>이 유명하다.
1799년 바이마르로 이사한 실러는 30년 전쟁(1618∼1648)의 비극적 영웅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인 ≪발렌슈타인(Wallenstein)≫과 시 <종의 노래(Das Lied von der Glocke)>를, 1800년에는 ≪메리 스튜어트(Maria Stuart)≫를, 1801년에는 ≪오를레앙의 처녀(Jungfrau von Or?ans)≫를 연이어 완성한다. 1802년에는 귀족 칭호를 수여받아 프리드리히 폰 실러로 불리게 되었다. 1803년에 실러는 ≪메시나의 신부(新婦)(Die Braut von Messina)≫, 1804년에 ≪빌헬름 텔(Wilhelm Tell)≫을 차례로 완성하고 ≪데메트리우스(Demetrius)≫를 작업하기 시작하지만 결국 끝을 맺지 못한다.
실러가 죽기 몇 달 전부터 실러가 죽었다는 가짜 뉴스가 나돌았다. 실러는 1805년 2월부터 실제로 심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실러는 5월 1일에 극장으로 가는 길에 괴테를 마지막으로 만났고, 9일에 폐결핵으로 인한 폐렴으로 마흔여섯 살의 나이로 죽었다. 1805년 5월 12일에 바이마르의 성 야곱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고 1826년 이장을 위해 발굴한 유골이 ‘안나 아말리아 도서관’에 보관되었다가 1827년 12월 16일 바이마르에서 새롭게 건설된 공동묘지의 ‘군주 묘역(F?rstengruft)’에 매장하지 않고 안치되었으며, 나중에 괴테도 본인의 바람에 따라 실러 옆에 놓이게 되었다.
실러는 평생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박차를 가했고, 최고의 이상을 추구하려는 명예심과 열정에 가득 찬 삶을 살았다. 그에게 이런 의지를 부여한 것은 뜨겁고 격렬한 감정으로, 더 높이 비약함으로써 헌신과 희생이라는 이상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실러는 비극적 운명을 도덕적 행위나 영웅적 행위 또는 범죄적 행위라도 인간의 위대함을 행해 가는 의지와 현세적 정의의 회복으로 생각되는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의 변증법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비극적 운명은 그의 드라마에서 역사적 세계와 현실의 세계의 상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실러는 이 역사적 현실에 의해 운명적인 인간의 삶의 현실을 보여 주려고 했던 위대한 작가였다.

목차

나오는 사람들

제1막

제2막

제3막

제4막

제5막

해설

지은이에 대해

지은이 연보

옮긴이에 대해

한줄 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