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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커버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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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 평점평점점평가없음
  • 저자김을한 지음 
  • 출판사페이퍼로드 
  • 출판일2010-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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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조선왕조 500년의 마지막 페이지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은 영친왕이라는 열쇠구멍으로 들여다본 왕조의 몰락과 왕실 사람들의 말로, 그리고 이를 둘러싼 현대사 이면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당사자들의 생생한 육성에 실어 들려주는 소중한 기록이다. 이와 더불어, 황태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간 영친왕 이은 씨의 안타까운 운명과 인간적인 면모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 책에는 영친왕뿐만 아니라 그와 인연을 맺은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아버님 고종과 형님 순종은 물론이고 덕혜옹주, 명성황후, 윤대비 등 왕가의 여인들, 그리고 의친왕과 이우 공을 비롯한 왕손들의 다채로운 에피소드는 쓸쓸하지만 때로는 흐뭇한 왕실의 뒤안길을 보여준다. 영친왕의 황태자비로 간택되었다가 파혼 당함으로써 평생 처녀로 늙었던 민갑완 여사, 고종을 도와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 말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평소의 소원대로 한국 땅에 묻힌 헐버트 박사의 뒷이야기는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이승만과 박정희, 이토 히로부미와 맥아더 같은 역사적 인물들도 선연이든 악연이든 영친왕과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오사카 역에서 중국의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를 만난 것도 영친왕의 비극적인 삶에 방점을 찍는 장면이었다.



격조의 왕자, 침묵의 왕자

영친왕은 기울어진 나라의 운명처럼 신산한 삶을 살았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가 되어 조선의 제 28대 왕통을 계승했지만, 형님이자 선왕인 순종이 승하했을 때는 이미 나라가 사라져 계승할 왕위도 없어진 뒤였다. 열한 살 어린 나이에 일본에 끌려갔고 일본의 왕족과 정략결혼을 했으며 1963년에 귀국할 때까지 50여 년을 일본에 머물렀다. 해방되기 전에는 일제의 볼모로 묶여있었고, 해방되고 나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견제로 귀국할 수 없는 신세였다. 이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온화하고 성실한 영친왕은 황태자로서의 기품과 격조를 잃지 않았으며, 작은 일이라도 조국과 민중에 봉사할 수 있는 것이 없을까 늘 고심했다. 6·25전쟁으로 한국에 주둔한 유엔군을 위해 『A First Book of Korean』이라는 한국어 교본을 저술한 일이나, 공부를 하려고 일본에 밀항한 청소년들을 구제하기 위해 백방으로 애쓴 일 등은 이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때가 오기까지는 모든 것을 꾹 참고 기다리라는 고종의 마지막 가르침을 가슴에 새긴 영친왕은 무척이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기쁠 때는 미소를 약간 짓고 슬플 때는 억지로 참고 있다가 아무도 없는 밤중에 이불 속에서 혼자 우는 것이 제 2의 천성이 되었다. 말년에는 실어증마저 겹쳤다. 그리운 조국에 돌아온 뒤 7년간 병상에 누워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깊은 한을 품은 채 영면했다. 나라를 빼앗긴 죄과 때문에 역사와 백성 앞에서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는 왕가의 업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최후였다. 하나뿐인 여동생 덕혜옹주도 정신병에 걸려 말을 잃었으니 남매의 운명 또한 기구했다.



한은 끝이 없고 눈물은 마르지 않는다

저자 김을한과 영친왕의 만남은 운명적이다. 김을한의 백부 김황진은 오랫동안 고종황제를 곁에서 보필한 시종이었고, 아내 민덕임은 명성황후의 친정인 여흥 민씨 가문의 여식으로서 덕혜옹주의 유치원 시절 동무였다. 저자 스스로는 신문사 특파원으로 도쿄에 주재하던 1950년부터 영친왕과 개인적인 인연을 맺었으며, 이후 영친왕이 서거할 때까지 어려운 처지의 영친왕에게 망국의 충신처럼 헌신했다.

김을한은 기자다운 엄밀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냉정한 사가(史家)의 눈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깊은 애정과 연민을 담아 이 책을 서술하고 있다. 영친왕과 덕혜옹주의 가련한 운명을 안타까워하고 그들이 선조의 땅에서 눈을 감고 뼈를 묻게 하겠다는 김을한의 뜨거운 마음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문장은 읽는 이로 하여금 인간 영친왕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게 만든다. 그가 쓴 서문의 제목이 ‘끝없는 한, 마르지 않는 눈물(無窮限 不盡淚)’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저자소개

190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을사년에 태어났다 하여 이름을 을한(乙漢)으로 지었다. 병자호란 때의 충신 김상헌의 후손인 그는 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양정고보 2학년 때 3·1운동을 맞았다. 그 직후 도쿄로 유학하여 와세다대학에 진학했다. 그곳에서는 김기진 등과 함께 극단 토월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귀국한 직후인 1924년, 조선일보 한기악 편집국장의 발탁으로 신문기자가 되었다.

식민지시대의 대표적인 저널리스트였다. 사회부기자 김을한은 그 당시 발생했던 큰 사건들을 밑바닥에서부터 파헤쳐 일제의 악랄한 식민정책을 폭로함으로써 이름을 떨쳤다. 광주학생운동, 장진강 토지사건, 만주사변의 치열한 현장에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생생한 실상을 보도하는 눈부신 활약을 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김을한은 서울신문사 특파원으로 도쿄에 주재하게 되었고, 이때 영친왕을 처음 만났다. 이후 20여 년 동안 영친왕과 덕혜옹주의 귀국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언론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도 활발한 저술 활동을 이어갔다.

『인간 이은』『월남선생 일대기』『여기 참사람이 있다』 등의 저서가 있다. 덕혜옹주의 유치원 동무였던 아내 민덕임을 먼저 보내고 못내 그리워하다 1992년 서울 반포에서 세상을 버리고 그 곁으로 갔다.

목차

끝 없는 한, 마르지 않는 눈물(無窮限不盡淚)·김을한|5

영친왕과 덕혜옹주, 그리고 내 아버지 김을한·김수동|7

영친왕을 위해 곡하다(哭英親王)·박종화|14



제 1부·왕조의 석양

도쿄에서|19

해방은 되었건만|27

이승만과 영친왕|32

윤대비의 기품|38

가엾은 덕혜옹주|45

사랑의 귀공자|51

의친왕과 이건 공|60

명성황후는 미인이었다|67

세 번의 통곡|72

고종의 고심|78

마지막 가르침|84



제 2부·망국의 볼모

정략결혼의 안팎|93

만년처녀 민 규수|101

여운형의 도쿄 방문|107

신혼마차에 날아든 폭탄|111

유럽 여행|117

상해임시정부의 영친왕 납치 기도|124

헤이그에서|130

10년 만의 득남|136

마지막 황제 부의와의 만남|140

하얼빈에서|145

불타는 민족혼|151

도쿄의 제 2 종묘|160



제3부·자유 없는 자유인

일본의 패전|169

평민으로 산다는 것|176

아들의 미국 유학|181

환국은 통일 후에|187

홍사익 중장의 비극|195

헐버트 박사의 귀국|202

6·25전쟁|214

밀항 학생들을 구하다|220

고집스러운 이 대통령|226

구황실 재산처리법|230

이승만과 요시다의 호랑이 문답|235

왕저는 사라지고|244

문제의 패스포트|249

이중의 국제결혼|255

지난한 국적 환원|263



제4부·창덕궁의 봄

창덕궁으로 환궁한 윤대비|277

창덕궁의 괴화(怪火)|284

주영대사를 고사하다|293

영친왕 쓰러지다|301

박 대통령과의 면담|307

덕혜옹주의 귀국|316

그리운 조국으로|324

고독의 왕자, 침묵의 왕자|331



에필로그|334

영친왕 연보|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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